눈에 선한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요약>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갈:3:1/새번역)   예수님은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바울은 A.D 33-36년 사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메섹 회심 후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가 길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은 다시 완악해지고 옛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 3장 1절을 보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절기도 지키고 구약의 제사도 다시 지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삶의 열매는 다시 예수님 믿기 전에 드러났던 옛 삶의 태도들이었다.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죄악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면 다른 죄악도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 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열매도 계속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임을 말씀해 준다. 열매는 그 뿌리와 나무의 결과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완악해져 가는, 육신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율법으로의 귀향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더 신령하고 거룩하고 타인보다 더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신실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서로 비난하고 경쟁하고 움켜쥐고 정죄하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은혜는 반대다. 그 뿌리가 아직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에 선한 것 같은 마음은 얼굴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울은 힘이 빠지고 낙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린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다가 누군가가 다시 옛사람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면 크게 낙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자처했다. 그럴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뿌리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에 선한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세월이 지나도 십자가가 눈에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계속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의 권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자. 이 말씀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씀이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 노력과 힘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매 순간 주님이 내 삶의 보좌에 않으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럴 때 두가지 은혜가 임한다. 세상의 정욕을 내가 참고 죽이려 하지 않아도 세상의 유혹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냥 힘을 잃고 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the world had been crucified to me”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 쪽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 정욕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 하는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상이 나를 보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를 잡는 사단이 우리 뒤에 있는 십자가의 권세,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은 자의 권세다. 변화된 삶은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이 계속 권세가 되어 나의 정욕, 세상 자랑, 욕망, 육의 사람을 죽인다. 내 안에 사랑, 용서, 평안, 기쁨, 겸손, 소망, 비젼, 거룩, 절제는 살아나게 해준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다. 당신 삶에 눈에 선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눈에 선한가?

형제를 보게 하는 사랑 <1부> | 높은 부르심 <2부>

<1부 - 양정상 목사님>
요한 일서 3:12-19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부 - 배현석 전도사님>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요약>
본문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자들은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평안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14년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미국의 18세 이상 성인 중에서 무려 44.7%의 사람들이 정신관련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성’(uncertainty)라고 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불확실성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볼 수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부의 불확실성을 ‘믿음’이 필요한 영역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장을 도전받습니다. 내적 불확실성은 그 크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할 때 해소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다는 것은 당시 어떠한 종교에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빠로 두었다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는 자신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1:1)(롬1:1) 이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한 13개의 목회서신 중에서 11개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힌 자”이다. 이렇게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본인이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밝힘으로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토록 강조하면서 서신들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 폭력과 위험들, 셀 수 없는 고생스런 선교 사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평생동안 독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대를 이을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도 버린 저주와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봤다면, 그가 극심하게 좌절하고 우울해질 이유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굳건히 붙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어떤 낯선 사람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사도, 성도, 그리스도 입니다. 이 중 ‘성도’라는 호칭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호칭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소리지르며 일렀습니다. (막1:24)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오늘 ‘성도’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ἅγιος (하기아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자’랑 원어로 보면 똑같은 말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모두 “거룩한 자”라고 말해주고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보다도 더욱 위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볼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 크리스토스에서 왔고 그 의미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를 가진 호칭이 되는가?(갈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라는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구원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작은 그리스도들, 작은 메시아들!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작은 메시아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가 입은 옷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인생에 무게에 마음이 내려 앉을 때에 더욱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향한 십자가의 걸음을 시작하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설교 요약>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절에(NIV) 보면 meet와 glorious riches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데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사람들은 위로와 격려, 기쁨, 소망을 주며 우리들의 삶을 부여케 한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만남은 우리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채워지게 한다. 또한 그 사람들을 우리들의 삶 안으로 이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 목숨을 드렸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 만남은 감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누가 복음 17장 17절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다 깨끗함을 받지만 한 명에 사마리아만 다시 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신다. 19-20절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는 그의 나병이 아닌 너 자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9명의 나병환자들의 필요는 채워졌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은혜가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 후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주목하고 믿으면 병보다 더 중요한 영혼인 그 사람 자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삶의 필요는 채워졌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감사한다고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는 아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감사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이 자신의 삶에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만을 예배하며 그 은혜가 커서 누군가에게 그 은혜를 주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의 일을 자원하는 것이다.

혼동
한 가지 혼동하지 말자. 병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일반 은총은 받았지만 구원 받은 특별 은총은 받지 못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적 리더가 9명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도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한번 받은 구원도 이후의 삶에 따라 다시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약에 경고와 두려움으로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하자. 그것은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섬기게 된다. 둘째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우러나는 헌신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감사의 능력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천국을 경험해도 내면에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요일 4장 18절에 보면 구원을 받았어도 두려움 속에 살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는 형벌과 고통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잘못된 추측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는 인생을 허비했고 아무것도 아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잘못된 추측들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잘못된 추측을 분별하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운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보면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올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원수는 떠나갈 것이다. 감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로 감사하고 삶으로 감사하라. 둘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라. 말로 편지로 행위로 감사를 표하라.

깊음과 얕음

누가복음 6:12-19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19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보여주고 싶은 천국

요한복음 3:1-8/16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요약>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저녁에 예수님에게 나왔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당시 최상류층 사람이었다. 니고데모는 은밀히 아무도 모르게 저녁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수 없음이니이다'(요3:2) 그의 말속에서 예수님을 높이고 칭찬하는 것을 엿볼수 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3:3)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칭찬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에게 두가지를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첫째. 너는 거듭나지 못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듭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를 알게 해준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당신은 당신이 본 어떤 아름다운 나라나 장소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것이다. 나는 하와이 이야기 열방대학 이야기를 종종한다. 그곳을 생각하면 열정이 타오른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큰 기쁨과 은혜와 치유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끼고 만져 본 곳이기에 표현이 생생하다. 그곳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잉크빛 바다와 열대아 나무와 완벽한 날씨이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기쁨과 치유와 은혜와 평안이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으로 알고있다. 둘째. 니고데모를 많이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오늘 크로스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맛본 '천국'에 당신도 들어오길 바라는 소망때문이다. 그럼 그 천국을 어떻게 들어갈수 있을까? 그 천국은 바람같은 성령을 통해 들어간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요한복음 3장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실체는 눈으로 볼수없다. 그러나 결과는 볼수있다. 따라서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셨다.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말 중요한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바람처럼 존재하신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한 것은 진리다. 성령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인격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보게 하신다.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 죄를 회개케 하신다. 그 바람같은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오로라 처럼 아름답게 승화 시키신다.성령은 예수믿는 후에 짖는 죄를 찔리게 하시고 새롭게 바꾸신다. 성령은 지구의 자전 공전 속도 보다 더 빠르게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우릴 데리고 들어가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에 아무소리 안들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으로 보고 느끼게 해주신다.

내가 존경하는 미국의 선교사 한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브레이 너드 다. 그는 1718년 커네디컷 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때 아버지를 잃고 14살때 어머니를 잃은 외로운 소년이었다. 방황끝에 21살에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일에서 공부하던 중 자신의 생애를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1743년 그의 나이 24살에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지만 그는 움막의 짚푸라기에서 자야했다. 옥수수 죽을 먹고 길을 잃어 온 밤을 늑대가 우글거리는 숲에서 자야만 하는 날들을 보냈다. 결국 피를 토하는 폐결핵에 걸려 몸이 쇠약해 져갔다. 그러나 29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갔다. 선교2년동안 인디언들은 그를 조롱하는것 처럼 전혀 변하지 않았고 죄악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런중 그가 절망중에 복음을 전하던 어느날 놀라운 성령의 부흥이 그 마을에 일기 시작했다. 그때의 한 상황을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회중위에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내리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놀라 엎드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영향에 놀라 그저 서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사로잡힌 것 같았고 마치 앞에 무엇이 있든지 다 쓰러뜨리고 휩쓸어 버리는 강한 폭풍과 엄청난 대 홍수의 저항할수 없는 큰 힘과 비교할 만했다.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구부리고 앉았고 그 놀라운 사실의 충격에 견딜 사람이 없었다. 중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러해 동안 술꾼으로 지내던 나이 많은 사람들과 6-7세 밖에 안된 조그만 아이들 까지도 자기 영혼에 대한 깊은 고뇌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 수그러지고 있었다. 그 전만 해도 스스로 의롭고 안전하다고 자랑하며 어떤 인디언들 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자기도 과거에는 10여년간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자신 만만하게 말하며 자기의 상태는 양호하다고 호언 장담하던 인디언 추장이 이제 와서 자기 영혼의 상태를 보고 심각하게 염려하며 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도 나이가 든 사람인데 살인자요 마술사에다가 악명 높은 술 주정뱅이 였는데 그가 눈물을 펑펑 쏱으면서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처한 위태한 사실을 볼때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투덜거렸다. 집 구석구석에서 사람이 모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고 문 밖에서도 또 여러 사람이 가지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람들 마다 자기 영혼에 대해 심각한염려를 하게 되었고 자기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이것이 바람같은 성령이시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천국을 맛보고 있는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거듭나고 천국안으로 들어온다.